기록이 남아 있어서 다행이라고 느꼈던 순간

가끔 블로그를 하면서
“이걸 왜 써놨지?” 싶은 글을 다시 보게 된다.

쓴 기억도 흐릿하고,
그때 왜 이런 말을 했는지도
잘 떠오르지 않는 글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글이 남아 있어서
조금 안도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


그날은
별일 없는 하루였다.

특별히 기쁘지도,
특별히 힘들지도 않은 날.

그냥 무심코
예전에 쓴 글 하나를 눌렀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잘 쓴 글은 아니었다.

문장은 길고,
정리는 안 돼 있고,
괜히 혼잣말 같은 부분도 많았다.


그런데
그 글을 읽으면서
묘한 감정이 들었다.

“아, 이때 나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지금의 내가 기억하고 있는
그 시기의 나는
훨씬 단순한 이미지였는데,
글 속의 나는 생각보다 복잡했다.


그때 깨달았다.

기억은
항상 현재의 내가
편한 쪽으로 고쳐 쓴다는 걸.

힘들었던 건 잊고,
불안했던 건 줄이고,
괜찮았던 부분만 남긴다.

그런데 기록은
그때의 상태를
그대로 붙잡고 있다.


특히 마음이 좀 지쳐 있을 때
이 기록의 힘이 더 크게 느껴진다.

지금의 내가
“나는 왜 이렇게 제자리일까”라고 생각할 때,
예전 글 속의 나는
비슷한 말을 하고 있다.

그걸 보면
조금 이상한 위로를 받는다.

아,
그때도 이랬고
그래도 여기까지 왔구나.


기록이 없었다면
아마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예전에는 더 괜찮았는데.”
“그땐 더 잘하고 있었는데.”

하지만 글을 다시 보면
그때도 고민하고 있었고,
확신은 없었고,
지금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다만 그걸
잊고 있었을 뿐이다.


그래서 요즘은
글을 쓸 때
미래의 누군가를 잘 의식하지 않는다.

대신
나중의 나를 떠올린다.

지금은 별 의미 없어 보이는 글이
몇 달 뒤,
몇 년 뒤에는
의외로 중요한 단서가 될 수도 있다.


물론 모든 글이
그럴 필요는 없다.

어떤 글은
그냥 흘려보내도 되고,
어떤 글은
다시 안 읽어도 된다.

하지만 남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선택지를 하나 더 만들어준다.

읽을 수도 있고,
넘길 수도 있다.

그 자유가
기록의 가장 큰 장점 같다.


블로그를 하면서
수익이나 조회수보다
이 점이 더 좋다고 느낄 때가 있다.

기록이 쌓였다는 사실.

잘 쓴 글이 많아서가 아니라,
그 시절의 내가
어떻게 살고 있었는지가
조금은 남아 있어서.


혹시 지금
“이 글을 써서 뭐 하지?”라는 생각이 든다면,
그 질문에 굳이 답하지 않아도 된다.

나중의 내가
그 답을 대신 해줄 수도 있다.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보다
이 글을 더 필요로 할지도 모른다.


기록은
항상 지금을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다.

가끔은
미래의 나를 위해
조용히 남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도
대단하지 않은 글 하나를
그냥 남겨둔다.

이게 나중에
다행이 될지 아닐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선택지는 남겨두는 셈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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