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이 쌓이면서 글이 달라진 지점

처음 글을 쓸 때는 항상 앞을 보고 썼다.

이 글을 누가 읽을지,

어떤 반응이 올지,

이 다음 글은 어떻게 이어질지.

기록이 많지 않으니까

자연스럽게

미래를 향해 쓰게 됐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글을 쓰는 방향이

조금 바뀌었다는 걸 느꼈다.

앞이 아니라

뒤가 생겼다는 느낌.

이미 써놓은 글들이

등 뒤에 쌓여 있는 상태에서

지금의 글을 쓰고 있었다.


가장 크게 달라진 건

설명하려는 마음이 줄어든 것이다.

예전에는

하나를 말하려고 해도

맥락부터 차근차근 설명하려고 했다.

혹시 오해할까 봐,

혹시 이해 못 할까 봐.

지금은

그런 걱정이 많이 줄었다.

이 글을 이해하지 못해도,

다른 글 어딘가에서

이미 비슷한 이야기를 해왔다는 걸

나 스스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기록이 쌓이니까

글이

조금 불친절해졌다.

그런데 그게

나쁜 불친절은 아닌 것 같다.

굳이 다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부분을

설명하지 않게 된 정도.

이 블로그 전체가

하나의 맥락이 되기 시작하면서

개별 글이

모든 걸 책임질 필요가 없어졌다.


문장도 달라졌다.

예전에는

마무리를 꼭 지으려고 했다.

결론을 내고,

의미를 정리하고,

읽는 사람이

뭔가를 얻어 가게 만들고 싶었다.

지금은

글을 끝내는 기준이 다르다.

“여기까지 쓰면

오늘의 생각은 다 나왔네.”

이 정도면

멈춘다.


기록이 쌓이면서

글의 속도도 달라졌다.

예전에는

한 편을 완성하는 데

시간이 꽤 걸렸다.

지금은

짧아졌고,

중간에 멈추는 것도

덜 두려워졌다.

이 글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 느낀 변화는

글의 태도다.

예전 글에는

은근히 설득하려는 말투가 있었다.

이렇게 생각해보라는 말,

이런 방향이 맞다는 뉘앙스.

지금은

그런 말들이 많이 빠졌다.

대신

“나는 이렇게 느꼈다”로

그냥 남긴다.

누군가에게

동의받지 않아도

괜찮아졌다.


이 변화가 가능했던 이유는

기록이 쌓였기 때문이다.

몇 편 안 될 때는

각 글이 너무 중요했다.

지금은

하나쯤은

별 의미 없어 보여도 된다.

그게

기록이 쌓였을 때 생기는

묘한 여유다.


가끔은

이렇게 생각한다.

만약 처음부터

지금 같은 글을 썼다면

아마 오래 못 했을 거라고.

앞에 아무것도 없을 때는

지금의 이 느슨함이

불안했을 테니까.

기록이 쌓여야

이런 글도

쓸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그래서 요즘은

글이 달라졌다는 걸

성장이나 퇴보로

굳이 판단하지 않는다.

그냥

쌓인 만큼

모양이 바뀌었다고 생각한다.

기록이 늘어나면

글도 그에 맞게

다른 얼굴을 갖게 된다.


혹시 예전 글과

요즘 글을 비교하면서

“왜 이렇게 달라졌지?”라는 생각이 든다면,

그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기록이 쌓였다는

아주 정상적인 신호일 수도 있다.

달라졌다는 건

그만큼

지나온 시간이 있다는 뜻이니까.


오늘의 글도

그 변화 중 하나로

그냥 놓아둔다.

언젠가 다시 읽으면

“아, 이때는 이런 지점에 와 있었구나”라고

알아볼 수 있도록.

그걸로

이 글의 역할은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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