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블로그 글을 지우는 일이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조금 마음에 안 들면 지웠고,
지금 기준에 맞지 않으면
아예 없던 일처럼 만들었다.
“어차피 아무도 안 봤을 텐데”
라는 말로
스스로를 설득했다.
지우기 시작하면
이상하게 기준이 점점 높아진다.
- 이 문장은 너무 어색한데
- 이 생각은 지금의 나랑 안 맞는데
- 이 글은 굳이 남길 필요 없지 않나
그러다 보면
지워야 할 글이
계속 늘어난다.
어느 날은
예전 글을 하나 지우려다가
괜히 다시 읽게 됐다.
지금 보면
솔직히 잘 쓴 글은 아니었다.
문장은 길고,
정리는 부족했고,
괜히 혼자 흥분한 흔적도 남아 있었다.
그런데도
지우기 직전에
손이 멈췄다.
그 글이
조금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부끄러움이
이상하게도
지우고 싶은 이유가 아니라
남겨두고 싶은 이유처럼 느껴졌다.
아,
이건 지금의 내가 아니라
그때의 내가 쓴 글이구나.
그날 이후로
글을 지우는 기준이
조금 바뀌었다.
- 틀린 정보인가?
- 누군가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가?
이런 경우가 아니라면
웬만하면 그냥 둔다.
잘 쓴 글이 아니어도,
지금의 나와 안 맞아도,
그 글이 쓰인 시간은
사라지지 않으니까.
예전에는
블로그를 하나의 작품처럼
관리하려고 했다.
통일성, 완성도, 방향성.
그래서 어긋나는 글은
지워야 할 것처럼 느껴졌다.
지금은
블로그를 작품이라기보다
시간이 쌓인 폴더처럼 본다.
안에 뭐가 들어 있어도
그게 자연스럽다.
지우지 않기로 하니까
이상한 변화가 생겼다.
글을 쓸 때
덜 긴장하게 됐다.
“이 글이 마음에 안 들면
나중에 지우면 되지”라는 생각 대신
“지금은 이렇게 쓸 수도 있지”라는 생각이 든다.
지우지 않는다는 전제가
오히려 자유를 준다.
물론
모든 글을 다 좋아하는 건 아니다.
지금 다시 보면
왜 이런 말을 했나 싶은 글도 있다.
그럴 때마다
이렇게 생각한다.
그때의 나는
그만큼밖에 몰랐고,
그만큼 느꼈다.
그걸 부정하지 않는 게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존중 같다.
예전 글을 지우지 않게 되면서
블로그는
정리된 공간이 아니라
변해온 흔적이 남은 공간이 됐다.
이전 생각과 지금 생각이
같은 페이지 안에
나란히 있는 상태.
처음엔 좀 어색했는데,
지금은 그게 마음에 든다.
지우지 않는다는 선택은
과거를 붙잡는 게 아니라
과거를 허용하는 쪽에 가깝다.
그때의 나도
지금의 나만큼
나였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
혹시 예전 글을 보면서
“이건 좀 창피한데…”라는 생각이 든다면,
그 감정이
꼭 지워야 할 이유는 아닐지도 모른다.
오히려
변했다는 증거일 수도 있다.
변하지 않았다면
부끄러울 이유도 없을 테니까.
그래서 요즘은
예전 글을 지울 때보다
가끔 다시 읽는 쪽을 선택한다.
그 글이
지금의 나에게
뭔가를 주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어디서 왔는지는 알려주니까.
오늘의 글도
언젠가
“왜 이런 생각을 했지?”라고
느껴질지 모른다.
그래도 괜찮다.
그때의 내가
지금의 나에게
남겨준 흔적이 하나 더 늘어나는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