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블로그 관리자 화면을 열었다가
스크롤을 한참 내린 적이 있다.

분명 최근 글을 보려고 연 건데,
페이지가 끝날 기미가 없었다.
그때 잠깐 멈췄다.
“아, 꽤 썼네.”
기록이 쌓였다는 느낌은
숫자로 올 때보다
이런 순간에 온다.
- 글 개수 몇 개
- 총 조회수 몇
이런 것보다,
스크롤이 길어질 때
갑자기 체감된다.
신기한 건
그 많은 글 중에서
제대로 기억나는 건
몇 개 안 된다는 점이다.
대부분은
“이런 글도 썼었나?” 싶은 상태다.
그런데도
그게 싫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만큼 시간을 보냈다는 증거처럼 느껴졌다.
기록이 쌓였다는 걸
가장 크게 느낀 순간은
예전 글을 검색으로 찾았을 때였다.
어떤 내용을 찾으려고
검색창에 키워드를 넣었는데,
내 블로그 글이 먼저 나왔다.
그 글을 읽으면서
처음엔
“누가 이렇게 썼지?” 싶다가,
작성자를 보고
잠깐 웃었다.
나였다.
그 순간이 묘했다.
누군가의 글을 읽는 것처럼
조금 거리를 두고 읽게 되는데,
문장 중간중간에서
“아, 이때 이랬지”가 떠오른다.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내가
한 페이지에서 만난 느낌이었다.
그제야 알았다.
기록이 쌓인다는 건
단순히 글이 많아지는 게 아니라,
시간이 겹겹이 남아 있다는 것이라는 걸.
그때의 생각,
그때의 말투,
그때의 고민이
층처럼 쌓여 있다.
이전에는
글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려고 했다.
이 글은 왜 쓰는지,
누가 읽을지,
쓸모가 있는지.
그런데 기록이 쌓이고 나니까
이 질문들이 조금 달라졌다.
“이 글은
어디에 놓이게 될까?”
개별 글보다
전체 흐름이 보이기 시작했다.
특히 좋았던 건
기분이 안 좋을 때였다.
괜히 모든 게 제자리인 것 같고,
아무것도 쌓이지 않은 느낌이 들 때.
그럴 때
예전 글들을 쭉 내려다보면
적어도 이건 분명해진다.
나는
아무것도 안 하지는 않았다는 사실.
물론
이 기록들이
어디로 이어질지는 아직 모른다.
나중에
다 지울 수도 있고,
다른 방향으로 바뀔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까지의 시간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요즘은
글을 쓸 때
조금 마음이 가벼워졌다.
이 글 하나가
대단하지 않아도,
이미 쌓여 있는 것들 사이에
조용히 놓이면 된다.
벽돌 하나처럼.
기록이 쌓였다는 걸
실감한 그날 이후로
블로그는
성과를 증명하는 공간이 아니라,
시간을 놓아두는 공간처럼 느껴진다.
잘 썼는지는
나중에 판단해도 된다.
지금은
그냥 남겨두는 걸로 충분하다.
혹시 요즘
“내가 뭘 쌓고 있긴 한 걸까?”라는 생각이 든다면,
숫자 말고
형태를 한 번 보길 권한다.
스크롤이 얼마나 내려가는지,
날짜가 얼마나 멀어졌는지.
그 안에
이미 쌓여 있는 게
생각보다 많을지도 모른다.
오늘의 글도
그중 하나로
조용히 놓아둔다.
지금은 별 느낌 없어도,
언젠가
“아, 이때 이런 생각을 했구나”라고
말하게 될지 모르니까.